공직사회 중심 소비 부진 현실화
외부 약속 잇따라 취소·더치페이
걸면 걸린다? 직무 관련성 혼란

▲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각 기관들이 임직원을 대상으로 ‘부정청탁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고 있다. 서영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강원도내 관공서 주변 고급음식점들이 ‘개점휴업’에 내몰렸다.시범케이스에 걸리거나 구설에 오르기 싫다는 분위기 때문에 관공서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다.우리사회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국민적 기대속에서도 첫날부터 심각한 소비부진 현상이 표면화됐다.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면서 장기불황에 시달리는 지역경제에 충격을 주지않을 묘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 고급음식점 한산

이날 낮 강원도청과 춘천시청 주변 식당은 시끌벅적한 이전 분위기와 달리 공사현장 인부,친목회 회원,상가직원 등 얼마되지 않은 손님들로 한산했다.단골 관공서 손님들 중 몇명을 제외하고는 주변 식당을 찾지 않았다.강릉에서는 달라진 점심식사 문화가 등장했다.강릉 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정기 교류모임을 가진 지역 관공서 기관장 7명이 식사를 끝낸 뒤 각자 비용을 지출했다.오해를 사지 않기위해 더치페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모임에 참석한 한 기관장은 “유관기관 간 소통·교류 활동을 아예 중단할 수 없기 때문에 회비를 모을까도 했는데 참석자들이 N분의 1로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따로 냈다”며 “자투리 남은 돈은 기관장 중 한명이 더 지불하는 방법으로 계산을 마쳤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을 맞은 원주시청 구내식당에는 공무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반면 원주지역 고급 한정식과 횟집,한우식당 등은 예약률이 급감했다.오히려 중저가 식당 예약률은 30% 오른 모습을 보였다.도내에서는 ‘이구구’ 식당을 찾는 고객들의 모습도 보였다.김영란법과 관련된 스마트폰 앱으로 2만9900원짜리 식당을 찾는 고객들이 등장한 것이다.이들은 ‘김영란 시대 함께 밥먹는 방법’이라는 더치페이 계산기 앱으로 식사 결제금액을 확인했다.점심시간 고객을 만나는 세일즈맨도 스마트폰으로 김영란법 앱을 찾느라 분주했다. 보험영업을 하는 정주호(28)씨는 “첫 대면 고객이 점심식사 겸 상담을 요청했다”며 “날이 날인 만큼 고객이 김영란법 저촉 대상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김영란법 사용설명서’ 앱으로 확인해봤다”고 말했다.

■ 직무관련성 모호,혼란 지속

김영란법 위반 시 처벌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인 ‘직무관련성’은 법 시행 첫날에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공직자,언론인,사립학교·유치원 임직원 등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 대상자 가운데 확실하게 이해하고 숙지한 사람은 거의 없다.특히 해당 기관들의 홍보 부서는 이날 오전부터 대외업무를 중단한 채 업무에 손을 놓고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춘천 한 기업 홍보팀은 10월말까지 외부 인사와의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주로 공공기관에 제품을 납품하는 회사여서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국민권익위가 법 시행전 “원활한 직무 수행 등의 목적으로 3만원 이내의 식사제공 등은 가능하다”고 유권해석을 내놓았지만 대상자들은 여전히 찜찜해하고 있다.언론인 A(45)씨는 이날 한달전 잡힌 약속을 취소하지 못하고 일반인과 점심을 했지만 결국 자신이 점심값을 모두 지불하는 것으로 해결했다.‘원활한 직무수행’을 목적으로 만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비 전체를 지불했다.A씨는 “권익위 유권해석도 판례가 없는 가운데 매뉴얼대로 풀이만 해주는 거라 믿지 못하겠다”며 “김영란법은 ‘걸면 걸리는 법’이란 우스개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 몸사리는 공무원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다.상당수 공무원들이 몸을 사리면서 외부인과의 교류를 사실상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춘천시청의 한 부서는 다른 부서 직원들과 식사하기 어려워진 탓에 한달치 구내식당 식권을 구입했다.시청 주변 식당을 주로 이용했던 공무원들이 김영란법을 의식,구내 식당 이용을 늘리고 있다. 공직사회가 외부활동에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인근 상가들은 울상이다. 정기인사 때마다 한 몫 잡을 수 있었던 꽃 집들도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급기야 황교안 국무총리는 김영란법 시행 하루를 앞둔 27일 “공직자들이 소극적 자세로 업무에 임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직무수행을 독려해 달라”고 했지만 현장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구정민·박성준·신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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