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인적·물적 교류 통로 역할

▲ 남북화해의 상징이었던 동해선 육로와 철도가 남북관계 경색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열차가 다니지 않은 동해선 제진역의 철도 레일은 붉은 녹이 슬어 있다.

 

2005년 동해선 육로와 연결·2007년 임시 열차 운행

철도 공용야드장 건설 한창…남북 교류 원활 기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도 강원도는 단연 분단의 상징지역이다.

그만큼 남북관계에 가장 민감한 곳이며 한반도 전체의 평화 또는 긴장 분위기를 좌우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DMZ를 사이에 두고 북고성과 남고성으로 분단돼 남북대립의 축소판으로도 표현되는 고성은 동해북부선의 연결로 비무장지대의 빗장을 열며 통일의 물꼬를 트는 듯했다.

동해북부선은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고성 사이를 잇는 철도선으로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1929년 9월 11일 안변∼흡곡, 1937년 12월 1일 양양까지 개설했다.

당초 경원선의 안변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삼척∼울진∼포항까지 연장해 동해남부선을 통해서 부산까지 직접 연결시킬 계획으로 착수된 철도선이다.

하지만 나머지 구간은 공사가 계속 진행됐으나 8·15광복으로 완공하지 못했고, 6·25전쟁 때 휴전선∼양양 사이의 철도는 철거됐다.

남북공동선언 이후인 지난 2002년 9월 기공식을 알리는 축포를 신호탄으로 수많은 장병과 중장비가 투입돼 육중한 철책을 밀어내는 공사 끝에 반세기 굳게 잠겼던 비무장지대의 빗장이 열렸던 동해 북부선 철도는 단절된 남과 북을 이어주는 화해와 화합의 가교로 주목을 받았다.

총 96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으며 단선으로 남측 7㎞, 북측 18.5㎞ 등 총 25.5㎞로 남북교류의 출입시설인 CIQ(동해선남북출입사무소)까지 동해선 육로와 함께 2005년 연결됐다.

이렇게 열린 동해선 육로를 통해 많게는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방문했다.

죽기 전에 북한 땅을 한 번이라도 밟고 싶어 했던 백발의 실향민에서 국토순례에 나선 대학생, 현장학습에 참가한 초등학생도 금강산을 보려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특히 2007년 5월 17일 동해선 열차 임시운행이 이뤄졌을 때는 마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열차가 임시운행하던 그날, 낯선 모습의 북한 열차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제진역에는 환영 인파가 북새통을 이뤘고 북한 기관사와 승무원은 취재진과 환영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플랫폼에 첫발을 내디뎠던 북한 기관사 로근찬 씨는 “조국 분단 역사에서 잊지 못할 날”이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고(故) 박왕자 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남북관계는 악화했고,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은 지금, 동해선에서는 언제 남북교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없는 상태다.

여행객으로 붐볐던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는 관광중단에도 그나마 일주일에 몇 명씩 금강산을 오가던 사업자의 발길마저 끊겨 썰렁하기만 했다.

▲ 우리나라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동해선 육로와 철도에는 적막함만이 가득하다.

남북이 손을 맞잡은 형상을 한 이 건물에서 금강산 관광객을 찾아보기는 당분간 어려울 전망이다.

인적이 끊기자 건물지하에 입주했던 매점은 물론 은행도 문을 닫고 철수한 지 오래됐다.

단 한 차례 북한 열차가 왔다간 제진역은 남북 간 열차운행이 더 진전되지 못하고 객차와 기관차마저 2008년 6월에 모두 철수하면서 현재로서는 역사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있다.

3년 전 열차시험운행 때 제진역을 찾아가 북한 기관사와 잊지 못할 악수를 했던 동해 북부선 마지막 기관사 강종구(89·현내면 대진2리) 씨도 최근 노환으로 몸져누워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철도가 끊기기 전, 강 씨는 동해 북부선 기관차를 몰고 함흥과 원산을 내 집 드나들다시피 했다.

그랬던 터라 그는 “살아생전 기관차를 몰고 예전에 다녔던 길을 다시 한번 달려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었다.

그렇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국도 7호선 확·포장공사 현장.

사실상 금강산과 연결되는 이 도로는 언젠가 남북이 통일됐을 때 사람 왕래와 물자 수송에 요긴하게 쓰일 길이다.

아울러 동해선 철도 공용야드장(12만6590㎡) 건설공사도 막바지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여기에는 남북측화물게이트, 컨테이너 적치장, 식물검역창고, 관리동이 9월까지 들어설 예정이다.

물론 남북교역이 중단된 현재는 제 구실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이 공용야드는 남북 간 화물·여객 수송을 담당하는 것은 물론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등 대륙철도와 연결되면 물류 전진기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황종국 고성군수는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그동안 추진됐던 각종 교류와 교역이 단절됐으나 언젠가는 다시 화합해 통일의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끝> 고성/김진영 king@kado.net





▲ 동해북부선 마지막 생존 기관사 강종구(89·현내면 대진리) 씨와 부인 장옥선(88) 씨.


“북녘 땅 간이역들 눈에 선해,  이제 영영 타지 못할 것 같아”

동해 북부선 마지막 기관사 강종구 씨




“다시 가고 싶어도 이제는 영영 못탈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부터 노환으로 몸져 누운 동해 북부선 마지막 생존 기관사인 강종구(89·현내면 대진2리) 씨와 부인 장옥선(88) 씨는 기차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흐른다.

강 씨는 6·25전쟁으로 철도가 끊기기 이전 운행됐던 동해선에서 열차를 운행했던 기관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인물이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기관사로 일한 강 씨는 주로 동해북부선에서 근무하며 대여섯 시간 걸리는 양양∼원산 간 철길을 왕래했다.

60년 전 동해북부선 열차를 운행하던 강씨 눈에는 지금도 양양을 출발한 열차가 속초와 간성을 지나 현재 통일전망대 바로 아래 초구역을 통과한 후 북한땅으로 들어서 삼일포, 외금강, 통천을 거쳐 원산에 다다르던 철길이 선명하다.

지금도 강 씨 눈에는 양양을 출발한 열차가 제진역을 지나 초구, 고성, 외금강을 지나 통천, 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기까지 철도변 사이사이에 있던 간이역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하다고 한다.

강 씨의 기억대로 동해북부선 철도는 지난 50년 6·25 전쟁의 포화로 철길이 사라지기 전까지 14년 간 양양∼원산 해안을 따라 182㎞를 달렸다.

동해북부선 철도는 양양은 물론 강릉의 초·중·고교생들이 봄·가을로 금강산 소풍을 가는 데 이용했으며 당시 종착역인 양양읍은 영동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였다.

강 씨는 일제에 징집돼 중국에 있다 돌아오기도 했으며 1945년 해방후 또 징집돼 평양에 있다 5년후 고향인 고성에 다시 돌아왔다. 당시엔 고성지역이 38선 이북지역이라 다시 월남해 서울에 기거하다 6·25 전쟁이 발발했다.

지난 2007년 동해북부선이 분단 반세기만에 복원됐을 당시 시범운행에 탑승하고자 했으나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겪은 강 씨는 탑승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강 씨는 “동해북부선 열차는 다른 사람보다는 아주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언젠가 열차를 타고 북녘 산천을 다시 바라볼 날이 오기를 고대했는데…”라며 눈물을 훔쳤다.

고성/김진영 ki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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