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봉래장서 시작된 정전회담, 포로송환 팽팽한 줄다리기
유엔군·공산군 38도선 시소게임
소련대사 말리크 정전협상 제의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
자유·전원송환 방식 놓고 대립


#수면 위로 떠오른 정전협상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51년 6월이었다.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그제야 비로소 단시일 내 서로 상대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그런데다가 전선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시소게임을 하는 것처럼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정전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그 신호탄을 쏜 사람은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였다.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이 한 마디는 전쟁 당사자,특히 미국에게는 복음처럼 반가운 말이었다.미국이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간절히 바랐던 ‘정전’이란 말이었다.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체면상 먼저 ‘정전’이라는 말을 차마 먼저 꺼낼 수 없었다.그런 가운데 대외적으로 소련 측에서 이를 먼저 제의하자 미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하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본심을 숨긴 채 몽니를 부리면서 겉으로는 말리크 소련대사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의문스럽게 슬그머니 정전협상 테이블로 나갔다.국제여론 역시 대체로 조속한 종전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존심을 건 정전회담

1951년 7월 10일 개성 봉래장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최초의 정전회담이 열렸다.이에 한국 이승만 대통령은 완강하게 정전회담을 반대했다.전국에서는 연일 휴전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났다.‘통일 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다’고 여학생들까지 나섰다.하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정전회담이 열리자 곧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본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한 서방기자는 한국전쟁 정전회담 취재차 3주간의 출장명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그만큼 서방 대부분 나라는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매우 쉽게 끝나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막상 정전회담에 참석한 양측은 서로 전장이 아닌,정전협상 테이블에서만은 자기네가 이기고 싶었다.특히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국은 그들이 형편없이 깔보던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 자체부터 치욕으로 느꼈다.그래서 미국은 그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정전회담에서 상대방에게 줄곧 무리한 요구를 했다.



#최대의 암초 포로송환협상

중국도 이참에 그동안 국제 사회에 ‘종이호랑이’로 실추된 그들의 자존심을 되살리고자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즐기면서 일축했다.그러면서 그들은 정전회담장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팽팽한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서방기자에게 보여주며, 이 기회에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를 마냥 즐겼다.그러자 정전회담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교전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그래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그 어느 전쟁의 강화회담보다 매우 지루하고도 잔인하게,그리고 장기간 계속되었다.

제네바협정 제118조에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끝난 후에 전쟁포로들은 지체 없이 석방,송환되어야 한다”고,포로의 자동송환 원칙을 밝히고 있었다.그런데 유엔군 측은 이 의제에 대해 느닷없이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포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나섰다.공산 측은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으로 포로들의 전원 송환을 강력히 주장했다.그러자 정전협상 의제 가운데 이 문제가 최대 암초로 떠올랐다.

유엔군 측이 자유 송환을 계속 들고 나온 것은 공산군 측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 주고 싶었다.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함과 아울러 북한과 중국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김으로써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속내였다.게다가 유엔군 측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는 13만 명 정도인데 견주어,공산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는 1만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유엔군 측은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가 적어도 5~6만 명은 되리라는 예상했다.하지만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 이에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자유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저자 박도(朴鍍)는 1945년 경북 구미 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교단에 섰다.현재 원주 치악산 밑에서 글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작품집은 장편소설 ‘약속’‘허형식 장군’ ‘용서’등이 있고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항일유적답사기’‘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영웅 안중근’등을 펴냈다.이 밖에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일제강점기’‘미군정 3년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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