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안중근 의사 거사
3·1만세운동·임정수립 영향
황해도 신천군 유적지 복원
정부·민간 차원 관심 필요
유해발굴 중·일 협조 도출
외교적 접근법 수반돼야

▲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110주년을 앞두고 지난달 30일 재개관한 중국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중국과 한국에서 찾은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  하얼빈역/남궁창성
▲ 안중근 의사 이토 저격 110주년을 앞두고 지난달 30일 재개관한 중국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중국과 한국에서 찾은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 하얼빈역/남궁창성

▲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저격후 수감돼 있다 1910년 3월26일순국한 중국 여순감옥을 찾은 한국기자들이 10일 오전(현지시간) 헌화하고 있다.  여순/남궁창성
▲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저격후 수감돼 있다 1910년 3월26일순국한 중국 여순감옥을 찾은 한국기자들이 10일 오전(현지시간) 헌화하고 있다. 여순/남궁창성

▲ 안중근의사 동상 및 저격시간을 알리는 시계.
▲ 안중근의사 동상 및 저격시간을 알리는 시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1909년 안 의사의 거사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한다.또 1930년대 만주에서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펼친 항일 무장투쟁의 시발점으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손꼽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1945년 해방이전에는 찾아 볼 수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반면 중국에서는 안 의사 거사직후 진덕수 전 북경대 교수가 중국 청년들에게 “콜럼버스와 안중근을 배우라”고 독려했고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동북항일연군에는 ‘안중근의 노래’가 군가처럼 불렸다.

오늘날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현안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황해도 신천군 청계마을 일원의 안중근 유적지 복원과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국기자협회가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하얼빈과 리순에서 개최한 세미나 ‘안중근을 만나다’에 참가한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안 의사의 청계동 유적지를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또 동행한 최봉룡 대련대 동북사연구센터 교수는 안중근 유해 발굴의 정치성 배제와 외교적 접근을 강도높게 주문했다.

유적지 복원은 2012년 11월 함세웅 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이 방북해 현지를 돌아보고 북한 측과 유적지 복원에 공감하면서 관심을 모았으나 그동안 남북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2018년 2월 남북 양측이 하얼빈에서 다시 만나 청계동 현지에 안 의사 기념관 건립과 유적지 복원에 공감하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정 소장은 “남북 교류와 협력시대를 맞아 남북이 모두 공감하는 안중근 유적지 복원에 정부와 민간 차원의 관심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안중근 유해 발굴은 일회성 이벤트와 같은 정치적 접근보다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추진해 중국은 물론 일본의 협조도 이끌어 낼 수 있는 외교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또 북한 측의 앞선 유해발굴 자료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도록 사전적 협력과 협의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최 교수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유해 발굴을 정치적 미끼로 삼아서는 안된다”면서 “국가차원의 유해발굴위원회 구성 등 시스템을 갖추고 내실있게 지속적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하얼빈/남궁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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