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은 깊고 그윽하다.붉은 울음을 토해 내듯 단풍이 들고 잎을 떨군다.메마르고 야윈 가지가 드러나 쓸쓸함이 더하지만 어찌 마냥 그럴까.생각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보라.올올이 꽉 찬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나온다.이런 풍성함을 어디서 맛보랴.으름,다래,머루의 달콤함과 산밤의 고소함이 더해지며 진홍빛으로 익어가는 가을산.질리지 않는다.먹지 않아도 배부른 추억이다.아르헨티나 시인 보르헤스가 ‘모래시계’에서 읊은 그대로 가을 산은 ‘시간을 옮기는 모래’일지 모른다.그 의식은 무한하며 시계속 모래처럼 우리네 삶이 ‘가는 것’이거나 ‘농익는 것’일 게다.

농익은 삶!무심코 마주친 가을 정경이 그러하다.아흔 노모와 밤을 줍는 아들 며느리는 무리지어 먹이를 찾는 멧돼지 가족과 같지 않다.차원이 다른 삶과 추억을 만든다.이들의 밤 줍기는 굶주림을 채우는 일이 아닐 것이다.가난했거나 모질게 느꼈던 어느 한 생애를 반추하는 일도 아닐 터,생애 ‘가장 아름답거나 즐거웠을 순간’을 추억하는 의식에 가까울 것이다.그 ‘추억의 의식’에 노모와 60대 아들 부부가 동행하는 건 행복,그 이상의 의미다.멧돼지 가족이 누릴 수도,만들수도 없는….

노유복 시인은 ‘옛 추억’이라는 글에서 ‘내 옛고향은/호박꽃,박꽃 지붕에 피고/호롱불 봉창은 가난 했었다’고 운을 뗐다.그러나 곧이어 ‘누런 들판엔 메뚜기들이/후두두 후두두두 떼 지어 날아/수수 밭 콩밭에도 푸짐했었다’고 추억한다.‘가난’과 ‘푸짐’을 대비시키며 ‘저녁밥상 둘러앉은 식구들 위에/하늘에서 은은히 별빛도 내려왔다’고 자랑(?)한다.추수가 끝난 고향 밥상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알 것 같다.가을은 그런 계절이다.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을마저 넉넉해지는,추억 하나 만으로도 살 것 같은.

가을이 무르익어 추억을 ‘만들 일’이 많아졌다.‘추억’을 취급하는 곳도 분주하다.이화순(57)씨가 그런 사람이다.(구)남춘천역 사거리에서 ‘추억의 뻥튀기’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추억 조율사다.뻥 소리와 함께 밤,쌀,귀리,콩,옥수수를 두서너 배 부풀리며 멀어진 과거를 현재로 유인한다.잊고 있던 한 때의 추억을 불러내 행복을 진열하고,즐거움을 나누는 일.단순하지만 값진 노동이다.뻥!뻥!뻥!추억이 부풀어 오른다.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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