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익은 삶!무심코 마주친 가을 정경이 그러하다.아흔 노모와 밤을 줍는 아들 며느리는 무리지어 먹이를 찾는 멧돼지 가족과 같지 않다.차원이 다른 삶과 추억을 만든다.이들의 밤 줍기는 굶주림을 채우는 일이 아닐 것이다.가난했거나 모질게 느꼈던 어느 한 생애를 반추하는 일도 아닐 터,생애 ‘가장 아름답거나 즐거웠을 순간’을 추억하는 의식에 가까울 것이다.그 ‘추억의 의식’에 노모와 60대 아들 부부가 동행하는 건 행복,그 이상의 의미다.멧돼지 가족이 누릴 수도,만들수도 없는….
노유복 시인은 ‘옛 추억’이라는 글에서 ‘내 옛고향은/호박꽃,박꽃 지붕에 피고/호롱불 봉창은 가난 했었다’고 운을 뗐다.그러나 곧이어 ‘누런 들판엔 메뚜기들이/후두두 후두두두 떼 지어 날아/수수 밭 콩밭에도 푸짐했었다’고 추억한다.‘가난’과 ‘푸짐’을 대비시키며 ‘저녁밥상 둘러앉은 식구들 위에/하늘에서 은은히 별빛도 내려왔다’고 자랑(?)한다.추수가 끝난 고향 밥상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알 것 같다.가을은 그런 계절이다.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을마저 넉넉해지는,추억 하나 만으로도 살 것 같은.
가을이 무르익어 추억을 ‘만들 일’이 많아졌다.‘추억’을 취급하는 곳도 분주하다.이화순(57)씨가 그런 사람이다.(구)남춘천역 사거리에서 ‘추억의 뻥튀기’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추억 조율사다.뻥 소리와 함께 밤,쌀,귀리,콩,옥수수를 두서너 배 부풀리며 멀어진 과거를 현재로 유인한다.잊고 있던 한 때의 추억을 불러내 행복을 진열하고,즐거움을 나누는 일.단순하지만 값진 노동이다.뻥!뻥!뻥!추억이 부풀어 오른다.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