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참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엄마와 함께 가는 논두렁길은 막걸리 주전자 춤추는 신나는 발걸음이다.모내기 일꾼들과 어울려 먹는 색다른 맛이 기대되기 때문이다.베보자기 덮힌 큰 함지박이 열리면 평소 못 보던 많은 음식들이 펼쳐진다.팥 못밥에,냉이비지국,고들빼기김치,강된장 호박잎쌈,개두릅나물,소금구이꽁치,논골뱅이무침,쇠미역튀김 등 감칠맛나는 음식들이다.그 중에 생미역과 멍개를 버무린 무생채 맛은 지금도 입가에 맴돈다.무의 상큼함과 미역·멍개의 알싸하고 입안 화하게 맴도는 맛은 바다와 땅의 하모니다.엄마손에서 만들어진 맛은 아직도 혀 끝에,또 깊은 가슴속에 남아 있다.그 옛날 한끼 때우는 음식들이 요즈음 맛집에서 대우받는 것은 가슴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추억의 맛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찾기 힘든 쑥버무리는 보릿고개 시절 애잔한 맛의 음식이다.밀가루에 쑥을 버무려 밥위에 찐 것으로 쌀이 귀할 때 끼니를 조금이나마 푸짐하게 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는 민초들의 음식이다.쑥은 봄날 들이나 산에서 맘만 먹으면 캘 수 있어서 배곯을 때 부지런만 떨면 좋은 먹거리다.초등학교시절 도시락의 시커먼 쑥버무리를 누가 볼까봐 창피해서 뚜껑을 여닫으면서 먹던 기억도 있다.밀가루를 적게 넣어서 색깔이 검은데 쌀가루를 충분히 버무려 만든 쑥버무리는 고급화된 지금의 맛이다.계절별로 다양한 먹거리도 추억의 맛을 더한다.봄길에 산딸기,뱀딸기,청미래,버찌 등은 쉽게 접하는 간편간식이며,힘들게 캔 칡뿌리는 영양많은 고급간식이다. 어린 찔레순을 잘라서 먹기도 하고 진달래꽃을 먹기도 한다. 막 익기 직전의 보리알을 오래 씹으며 껌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절도지만 여름·가을 과수원 서리의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돗자리 밑에 감춰 바짝 말린 알밤은 사탕처럼 입속에 굴리며 오래 먹는 대표적 한겨울 간식이다. 방구둘에 마른 밤이 있다면 부엌 흙바닥 속에는 살아있는 생밤이 있다. 습기가 많은 부엌바닥에 묻어 뒀다가 캐서 먹기도 하고 설날이나 제삿날에는 제수로 썼다.뒤안 처마밑 큰 독 마른 솔잎속에 감을 담아두면 겨우내 홍시된다.한겨울에 살짝 얼려 꺼내 먹으면 훌륭한 아이스크림이다.

그 시절 맛들은 자연과 더불어,또는 삶의 현장에서 보던 맛으로 그 기억들이 생생하다.그 맛들은 우리의 가슴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어 언제라도 꺼내 느낄 수 있는 깊은 맛이다.그 때와 다른 시절을 살아가는 요즈음,즉석으로 대하는 맛보다는 다양한 체험과 자연으로 느껴지는 순수한 맛을 많이 접하면 맛의 추억이 되살아 날 것이다.

정호백· 전 양양우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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