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 주순영 강원도교육청 부대변인
▲ 주순영 강원도교육청 부대변인
날마다 터져나오는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마음 가눌 길 없는 착잡함과 함께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진다.이제 우리는 좀 더 나은 사회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나에게 좋은 사람,나쁜 사람으로 가르는 기준은 딱 하나다.‘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 기준이다.나이,성별,지위,외모,학벌,성격,출신지 따위로 차별하고 배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다.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차별을 경험하며 산다.그 가운데 가장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차별의 기제는 성별이 아닐까 싶다.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차별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 고백 이후 어느 분 페이스북에 ‘세상에 성추행을 안 당해 본 여성이 있을까?’라는 문구를 올렸다.나는 바로 ‘단언컨대,없다’라는 댓글을 달았다.내 글 뒤로 다른 많은 여성들 역시 ‘없다’,‘절대 없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겪은 성추행의 경험들을 쏟아놓았다.남자들의 반응은 ‘헉’ ‘그 정도로 심각하군요’ ‘그 정도인줄 몰랐다’ 같은 대답이 줄을 이었다.정말 몰랐나보다.전통적인 가부장 남성우월주의,식민지 군사문화,서열주의,학벌주의,성과주의가 공기처럼 퍼져있는 사회에서 특별할 것 없이 자연스레 성장해 온 남자들이다.남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습관으로 자리잡혀 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아무 의식 없이 성추행,성희롱을 하고 그 인식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게 사실이다.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다.올해 2월 20일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정했다.법정기념일이 됐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지려나.문재인 대통령은 여성의 날 축사에서 “성평등이 모든 평등의 출발이다.더 좋은 민주주의도,지속가능한 경제성장도 성평등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내 삶을 바꾸는 시작이 성평등”이라 했다.우리나라에서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삶을 누리려면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할까?

그나마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이다.오랜 세월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우리 삶을 칭칭 옭아매고 있던 여성혐오! 젠더질서의 깊고 깊은 곳에 뿌리 내린 여성 혐오! 남성에게는 ‘여성멸시’,여성에게는 ‘자기혐오’로 작동해 온 여성혐오! 그것을 숙주삼아 성희롱,성추행,성폭행이 우리 일상에 파고 들어왔다.세상에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도 없건만.

이제 파괴된,상처 입은 영혼들이 행동하기 시작했다.이 거대한 적폐를,음모를,어둠의 질서를 스스로 거둬 내고 있다.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증언하고 있다.두려움을 뒤로 하고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로 세상을 향해 자신이 존엄한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다.더 이상은 누구의 무엇으로,지위로,성별로,역할로,도구로 살지 않겠다는 자기 해방을 선포하고 있다.‘사회 변혁’의 도구를 넘은 이 선언은 또다른 상처 입은 가슴들을 어루만지며 증언의 횃불을 이어들게 만들고 있다.횃불이 들불이 되어 세상을 밝혀나가고 있다.우리는 증언하는 개별 존재에 집중해야한다.집중의 끝은 지금 그 사람의 마음에,아픔에,슬픔과 두려움에,용기에 가 닿는 일이다.그게 진정한 공감이다.

내가 믿는 한가지가 있다.그것은 여성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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