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게르니카
나치 “ 당신(피카소)이 그렸소?”
피카소 “ 아니 당신들이 그렸소”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폭격
도시 인구 3분의 1 사상자 발생
피카소의‘게르니카’ 탄생 배경

‘게르니카’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피카소 때문이다.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예술가 피카소의 대표작이니까 말이다.

▲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재현한 벽화
▲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재현한 벽화
게르니카는 작품 이름이기도 하고 옛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작품 게르니카가 전시되어 있는 곳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이다.소피아는 현재 스페인 왕 펠리페 6세의 모친이다.그곳 206호에 게르니카가 전시되어 있다.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술관에 들어가면 우선 그곳부터 찾아 들어가게 마련이다.루브르의 모나리자,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의 벨라스케스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바스크 지방의 주도(州都) 빌바오를 찾았다.강원도 원주만한 크기의 도시다.쇠락한 철강도시가 유럽 최고의 관광도시로 바뀐 곳이다.연간 백만 이상이 찾는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은 그런 명성으로 세계인을 빨아들인다.그 바스크 지방에 가서 작품 ‘게르니카’를 알고 있는 한,그 옛 도시였던 마을을 그냥 지나쳐 올 수는 없었다.아무리 시간이 빠듯하고 기상 악화가 심하더라도 말이다.돌아오는 길 마드리드 북부지방이 비가 폭설로 변할게 될 줄도 물론 그때는 알 수 없었다.하루 종일 비에 하늘은 한없이 어두웠다.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파시즘의 득세로 구체화되던 그 때의 게르니카 분위기가 그랬을 것이다.

스페인 정부와 프랑코 반군이 내전을 치르던 때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는 정부군의 주요 거점이었다.프랑코의 요청으로 히틀러의 나치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공군이 스페인정부군의 퇴로를 막고자 엄청난 폭격을 여기에 가했다.도시는 초토화되었다.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사상자가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조국의 상황에 대한 피카소의 분개와 작품 게르니카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가로 7.8미터,세로 3.8미터의 거대한 화면으로 작품 게르니카 걸렸고 이후 8개국에 순회 전시되었다.작품 게르니카는 세계의 시민군 5만 명이 스페인의 공화파 즉 정부군을 돕게 나서는 일의 촉매가 되었다.‘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헤밍웨이를 비롯해 ‘카탈루냐 찬가’의 조지 오웰,‘어린왕자’의 생텍쥐페리 등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던 세계의 지식인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후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이후 36년간 스페인 총통으로 군림하게 된다.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다.

▲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 입구
▲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 입구
나치 장교가 작품 게르니카 사진을 가지고 피카소에게 물었다.“당신이 그렸소?” 그 때의 대답이 유명하다.“아니 당신들이 그렸소.”피카소는 독재자가 사라진 스페인에 게르니카를 보내길 원했다.덕분에 뉴욕 현대미술관이 오랫동안 이 게르니카를 보관했었다.1980년대가 되어서야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그것을 지금은 레이나소피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빌바오 구겐하임으로부터 강원도 산골 같은 길을 한 시간 정도 달려야 게르니카에 닿는다.비에 흠뻑 젖은 작은 마을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명성을 드러내지 않았다.착하고 순박한 시민들이 나서서 길을 알려주는 벽화에 가서야 역사의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흑백의 암울한 색조,처음 충격적인 신문기사를 접하는 느낌이 전해져오는 그림.좌측에 스페인 상징 황소,그 아래 피에타처럼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그 아래는 요동치는 말에 짓밟힌 죽은 병사가 있다.왼손 바닥은 예수처럼 못 박힌 흔적이 있고 오른손엔 부러진 칼이 들려있다.부러진 칼 앞에 피어오르는 가냘픈 꽃 한 송이가 애처롭다.중앙 상단에 부릅뜬 눈,오른쪽에 절규하는 사람을 뒤로 두고 촛불을 밝히고 다가서는 사람들이 깨어있는 시민의 궐기와 같은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게르니카를 이렇게 작품으로 올려놓고 자세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저작권 때문이다.피카소의 저작권은 특히나 비싸다.벽화를 빌어 명작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모두 그 때문이다.‘게르니카(Guernica)’를 게르니카에게로….바로셀로나가 있는 지금의 카탈루냐보다도 더 격렬한 분리 독립 움직임과 무장투쟁이 있던 곳이 이 게르니카를 포함하고 있는 바스크 지방이다.그 바스크의 게르니카 마을에서 벽화 아래 새긴 글이다.

>>> 최형순 미술평론가

정선에서 태어나 정선고·강원대를 졸업했다.서울대 미술이론 석사,홍익대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역임했다.1998년 구상전 공모 평론상을 수상하고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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