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판은 맵다.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이 잠시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시간,그 찰나의 흐름은 가끔씩 끊기고 정지된다.어쩌다 햇살에 녹아내린 자투리 시간이 두어 뼘씩 공간을 내주지만 이내 칼바람에 포위되고….더디고 지루한 한겨울의 낮과 밤.그러나 이 계절에도 시간을 익히는 맛의 비밀은 존재한다.동치미!움츠러든 겨울을 극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맛이다.살얼음 얇게 두른 동치미 한사발의 힘,온 몸의 세포를 자극하며 구석구석에 박힌 독소를 제거한다.베타인과 식이섬유로 무장한 천연 해독제!

동치미를 담그는 방법은 그 풍미에 어울리지 않게 간결하다.18세기 정조·순조 당시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 10월,11월편을 보면 “서울의 풍속에 무,배추,마늘,고추,소금 등으로 독에 김장을 담근다.뿌리가 비교적 작은 무로 담근 김치를 ‘동치미(冬沈·동침)’라 한다”고 했다.무에 소금물을 붓고 은근히 삭히는 음식인 것이다.규합총서와 주찬(酒饌),부인필지,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엔 동치미를 다른 식재료와 응용한 음식이 등장,풍미를 돋운다.담족김치(淡足沈菜·담족침채)와 꿩(生雉·생치)김치,냉면,동치미국수 등.

동치미의 효능은 어떨까.무가 주재료여서 소화효소가 풍부하고 숙취해소와 해독작용이 뛰어나다.넣는 재료에 따라 맛과 풍미도 달라진다.배,유자,사과,파 등 식재료의 양과 종류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이다.동치미 국물에 삶은 국수를 넣고 김치와 참기름,통깨,설탕,계란으로 버무린 고명을 얹으면 훌륭한 동치미국수가 되는 것처럼.이런 방법으로 태어난 음식이 강릉과 양양,평창 일대에 널리 퍼진 동치미 막국수다.아삭한 무의 식감과 메밀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별미!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작은 신현배 시인의 ‘동치미’였다.그는 이 시에서 ‘동치미’를 “할머니 살아생전 눈물 많은 섬을 놓아/적당한 소금기로 간을 맞춘 눈물바다”라고 표현했다.이어 “한사발 넋을 부어 차오르는 설움이여/썰물 되어 떠난 얼굴 지워진 그 자리에/서릿빛 그리움으로 목이 메는 물소리”라고 읊었다.겨울이 깊고 깊게 박힌다.날선 추위가 동치미 항아리에 살얼음으로 잡히는 시간,시린 손 호호 불며 동치미를 퍼 나르던 어머니의 손길이 그립다.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