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3일,미쉘 캉드쉬(Michel Camdessus) IMF(국제통화기금)총재는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입국하자 마자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경제부총리를 만나 구제금용 합의서에 서명했다.이 서명으로 IMF에서 19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대한민국은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를 면하게 된다.IMF 외환위기로 불리워진 ‘IMF 시대’의 시작이었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대가는 혹독했다.꼭 20년 전인 1997년 12월11일,정부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자본시장을 전면개방하는 조치를 한다.그 날은 마침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S&P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3단계나 하향조정하는 날이기도 했다.환율과 기업어음(CP) 금리도 연일 최고치를 기록했다.수 많은 기업의 부도와 도산은 엄청난 실직자를 양산했다.가족이 해체되고 노숙자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이렇듯 IMF 시대는 예상보다 혹독하게 국민을 짓눌렀다.

그러나 국민들은 경제적 고통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국민이 나서 직접 국가부채를 갚자는 ‘금모으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국민이 각자 지니고 있는 금을 모아 외환보유고를 늘리겠다는 국민운동이었다.이 운동으로 전국에서 350여 만명이 참여해 금 227t,21억 달러를 모았다.당시 외환부채가 304억달러였으니,국난극복을 위한 국민의 의지가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겠다.한편 금모으기 운동은 최종 결제수단인 금 값 상승을 불러왔고 이를 악용해 부를 축적한 일부 부유층도 있어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가혹한 고통을 줬던 IMF의 영향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중산층의 급격한 감소와 양극화의 심화,그리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고용환경이 그것이다.또한 조기 퇴직자들이 시작한 자영업의 성공도 쉽지 않은 일이 됐다.이른바 흙수저들은 ‘개천에서 용난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고 ‘조물주보다 건물주’라는 자조섞인 유행어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다.

‘IMF 시대 그 후 20년’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로 상징되는 부의 양극화는 이 시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무거운 숙제가 됐다.

천남수 사회조사연구소장 chonns@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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