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여년 전 낯선땅에 일군 첫 마을 … 모두 떠난곳 외로운 비석만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 시작
이주행렬 급증 ‘포시에트’에 정착
최초의 고려인마을 ‘지신허’ 형성
1937년 강제이주 후 폐허로 변해
2004년 가수 서태지가 비석 헌정

▲ 이현창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한인회 이사가 1860년대 이후 조선인이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한 통로인 포시에트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 이현창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한인회 이사가 1860년대 이후 조선인이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한 통로인 포시에트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고조선에서 고구려,발해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 영토이자 러시아,일본,중국 등 강대국의 각축장이었다.러시아는 1860년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 청나라와의 베이징조약에 따라 연해주 일대를 넘겨받았다.이후 러시아 정부의 공식기록상 러시아 연해주에 한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1863년 9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시작됐다.연해주의 새주인이 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연해주 이주민에 대해 20년 무세금 혜택과 군사의무 면제 등의 혜택을 부여하며 이주를 적극 권장하면서 한인들의 이주행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이에 연해주 총독은 1864년 한인들의 이주를 공식 허가한다.당시 한인들은 두만강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포시에트 일대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했다.이곳을 발판으로 연해주 고려인마을은 폭발적으로 커져 1930년대 들어 20만명을 넘어선다.하지만 이들은 1937년 9월 스탈린의 한인 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등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던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마치 ‘아리랑 고개를 넘어넘어’ 현재까지 드라마 같은 민족의 역사를 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이에 본지 취재팀은 지난 달 ‘고려인 강제이주80년’을 맞아 진용선 아리랑박물관장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 일대를 방문,고려인들의 이주역사와 후손들의 아리랑 전승실태를 되돌아봤다.

▲ 지신허마을에 조성된 고려인 이주 헌정비.
▲ 지신허마을에 조성된 고려인 이주 헌정비.
연해주 최초의 고려인 마을 ‘지신허’

최근 한·러교류의 전초기지로 떠오른 블라디보스톡은 고려인의 생애를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블라디보스톡에서 남우수리지역 방면으로 국도 189호선을 타고 250㎞ 가량의 거리를 승용차로 3시간여 달리면 러시아 한인 이주역사의 시원지인 포시에트만에 도착한다.1863년 당시 조선인들은 월경을 금지했던 국법을 어기고 두만강을 건너 노브고로드만 연안의 포시에트 바닷가에 첫 발을 내디뎠다.이곳은 현재 러시아 국내에서 채광한 석탄들을 취급하는 산업항으로 변모했다.

우리나라의 면단위 행정구역인 포시에트에는 조선인들이 정착하면서 사용한 농기구와 생활도구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박물관 구조는 100㎡ 규모의 크기에 맷돌,쟁기,다리미 등 우리민족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전시물이 보관돼 있다.포시에트만에서 오던길을 되돌려 10㎞ 안팎 거리의 크라스키노 길목에 ‘비노그라드노예’라는 지역에 도착한다.이곳이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이 처음 ‘한인마을’을 형성한 ‘지신허’(Tizinkhe)이다.지신허는 러시아와 중국 훈춘의 국경지대에 위치해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출입 통제소에서 지신허 마을터까지 가는 길은 비포장에 안내표지판 조차 없어 현지인의 안내가 없다면 쉽게 찾기 어려운 길이었다.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펼쳐진 갈대숲을 헤치고 찾아간 지신허 마을에는 지난 2004년 가수 서태지가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맞아 헌정한 비석이 세워져 취재진을 놀라게했다.150여년전 한인이 거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한 지신허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이후 폐허가 되어 허허벌판을 변했다.서태지가 헌정한 비석 마저 없다면 지신허 마을의 터 조차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다. ▶동영상 kado.net

취재진은 다시 고려인의 시원지 ‘지신허’를 떠나 아리랑이 불려진 연해주 북부지역으로 향했다.현지안내를 맡은 이현창 러시아블라디보스톡한인회 이사는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하루하루 힘겨운 여정을 이겨내면서도 일종의 해방구를 찾은 감정이었을 것”이라며 “비옥한 토지를 개척하고 힘겨운 삶을 이겨낸 한민족의 혼이 담긴 현장이 바로 연해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연해주/박창현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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