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칠

춘주수필문학회장

화청궁에 어둠이 깔리자 장한가 공연의 막이 올랐다.궁전 앞의 특설 무대만 보고 있던 시선이 순간 충격으로 놀랐다.광대한 자연공간에서 펼쳐지는 장엄함에 넋을 잃을 듯 했다.장중을 압도하는 음악,물속을 솟구쳐 리듬을 만드는 분수와 환상적인 조명,전각 건물과 연못,궁 뒤의 화산전체가 움직이는 무대였다.갑자기 우주는 촘촘한 별빛으로 수를 놓는데 외로운 초생 달이 하늘에 걸렸다.그 때 활옷차림의 선녀가 구름을 타고 연못가에 사뿐히 내린다.기다림에 목마른 듯 제왕 복장의 사나이는 옥좌를 박차고 달려와 여인을 맞이하여 함께 춤을 춘다.환희의 만남은 잠시 뒤 폭풍우에 묻히고 죽음과 이별,꿈속의 재회로 이어졌다.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 1300년 뒤 화청지의 물결위에서 다시 피어난 것이었다.

화청궁은 중국 산시 성 시안의 황실별궁이고,장한가는 백거이가 읊은 현종과 양귀비의 애달픈 사랑의 서사시다.모두 7언120구,840자에 이르는 장시인데 이를 연극으로 꾸민 것이었다.이 작품은 시안 출신의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의 솜씨라 한다.장 감독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개폐회식을 연출한 야외공연의 대가인데,10만 명이 동원된 베이징에 비하면 장한가 쇼는 300여명으로 규모가 작긴 하지만,기존 시설 과 공간을 무대로 끌어들인 대담한 기획,색채중심의 화려한 영상미는 역시 장이머우다운 웅장함이 있었다.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우리가 나무나 잘 아는 황실 판 러브스토리이다.현종은 당나라의 6대 황제로서 영특한 머리와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반대파를 물리치고 27세에 즉위 한 사람이다.‘개원(開元)의 치(治)’를 열고 개혁과 선정을 베풀어,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그런데,말년에는 총명이 흐려져서 충신들의 직언에는 귀를 막고 환관과 간신배들의 감언이설을 즐기게 된다.특히 양귀비를 만나면서 국사와 조정,백성은 완전히 잊은 채,오로지 젊은 여인의 품속만 파고들었다.양귀비는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이모(壽王李瑁)의 아내였으니까 자기며느리를 가로챈 것. 그런 결과는 어떠했는가? 양귀비 일당의 권력 독점과 전횡,간신배들의 농간과 부정부패,백성들의 고통과 한숨,급기야는 ‘안녹산의 난’으로 이어졌다.반란소식에 놀란 현종은 급한 피난길을 가던 중,성난 군사들이 간신들을 도륙하고 양귀비는 배나무에 목매달아 죽이는 참혹한 꼴을 당한다.나라 파탄의 원인을 만든 ‘한 미인’의 교태! 한 시간 넘게 진행되는 장한가 쇼를 보면서,색정에 빠진 빗나간 사랑을 오히려 아름답게 각색한 중국인들의 깊은 속내가 궁금했다.바야흐로 대륙의 굴기가 용트림치고 있는 것이리라.그런데 우리네 실정은 어떠한가? 정체불명의 ‘한 여인’의 농단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선량한 사람들의 순수한 믿음을 송두리 채 으깨버린 이 참담한 배신감,목울대를 찌르는 분노….그러나 우리는 국가 앞에 냉정해야한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