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을 읽고
양정근 11정보통신단 61대대 무선중대 일병

▲ 양정근 11정보통신단 61대대 무선중대 일병

신병훈련소에서의 마지막 훈련으로 행군을 할 때다.산 중턱에서 꽤 긴 다리를 만났다.그 높이가 대단해서 아래쪽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다리 밑에는 꽉 얼어붙은 강물이 있었고,모질게 입을 다물고 있는 바위들이 있었다.수년간 내가 문을 두드리던,그러나 끝내 열리지 않았던 합격의 문처럼 아주 굳은 표정의 풍경이었다.현기증이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으면,5주 간 새로운 생활과 훈련에 쫓겨 밀어놓았던 기억들이 하나씩 나를 덮쳤다.

빽빽하게 필기했던 법전,지금 이 순간도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다른 사람들,그리고 아버지.서른이 된 아들에게 여태 용돈 한 번을 받아 본 적 없이,오늘 새벽도 언제나와 같이 운전대를 잡고 손님을 태우고 계실 나의 아버지.불현듯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갔다.열 수 없는 문이라면 차라리 온몸으로 부딪쳐서 깨버리자는 심정이었다.그러나 깨지는 것은 나뿐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럴 수도,저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신병들의 대열의 끝자락에서,방탄모 밑에 숨어 나는 울었다.

자대에 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엄한 표정도,친절한 손짓도 모두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어서 언제나 달아나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렇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쫓기듯 들어간 곳은 도서관이었다.마지막 불합격 통보 이후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곳,그 곳에서 나는 십여 년 만에 ‘죄와 벌’을 만났다.누구에게나 오만하고 무엇에나 자신만만하던 그 때 내가 읽었던 ‘죄와 벌’은 어긋난 초인론에 사로잡혀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를 죽였던 한 남자의 죄와 그에 대한 기독교적 구원론의 복음서에 불과했다.그러나 모든 과거가 죄 같고,모든 미래가 벌 같은 지금 다시 읽은 ‘죄와 벌’은,스스로 만든 절망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던 한 사내의 피맺힌 고통의 기록,아니 고통 그 자체였다.

노파를 죽이기 전의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상황이었는가.오만하고 예민하며 자존심이 강하지만,타인을 위하는 마음 역시 무척 강했던 젊은이.당시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대학생의 신분이었지만 극도의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는,사랑하는 사람이 병으로 죽어갈 때도 무엇 하나 해주지 못하고 그저 지켜봐야 했다.

이렇게 멈춰버린 자신의 꿈을 되살려주기 위해 가족이 보내는 무한한 헌신과 희생은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명줄이었지만,동시에 가장 큰 고통이기도 했다.나 역시 그 괴로움을 익히 알고 있다.사랑하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서 연명하고 있는 기분,그리고 결국은 무엇 하나 갚지 못한 현실로 인해 나 또한 고시촌의 관 같은 좁은 방 안에 나를 가두고 나오지 않았었다.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무엇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것은 스스로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잉태된 사상이다.그는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을 나누어,후자의 경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양심의 영역’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비범한 사람,즉 초인의 핵심은 어떤 행동도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인 바,이는 결국 인간성의 무딤에 다름아니다.

왜 초인의 조건이 무감각이었을까.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버티고 있는 자신의 삶을 볼 때 느끼는 고통,그는 바로 그 괴로움에 무너지기 싫어서 무뎌지길 바란 것은 아닐까.너무나 아팠기에,완전히 무뎌져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자신이 되고 싶어서 노파를 죽였던 것은 아니었을까.그는 전당포의 노파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이와 같다고 선언한다.이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었다.그렇기에 노파를 살해한 행위는 라스꼴리니꼬프 자신을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었다.소냐가 그에게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절규하며 안아주었던 것도 자살과도 같았던 그의 살인의 본질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결국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인해 자신을 포기하고 그 깊은 구렁텅이 안으로 자신을 집어던진 것,이것이 라스꼴리니꼬프의 죄의 본모습이자,나의 죄의 정체였다.

만약 그가 생각한대로의 초인이 되었다면 라스꼴리니꼬프는,그리고 나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에 입각할 때 초인이라 할 수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와 루쥔의 삶은 ‘무뎌진 상태’ 역시 해결책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두 사람 모두 자신의 추구하는 바를 위해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행했지만,스비드리가일로프가 추구한 쾌락의 끝은 헤어 나올 수 없는 허무함이었고,냉혹한 계산으로 세상을 상대하던 루쥔의 끝은 치욕이었다.무엇보다 그들은 두냐로 상징되는 고결함을 잃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나는 어떻게 해야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마르멜라도프는,‘모든 사람에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라도 필요’하다고 말한다.이는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떠나,언제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줄 안식처를 가리키는 것이다.라스꼴리니꼬프에게는 소냐가 그곳이었고,따라서 구원의 시발점이 되었다.스스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소냐가 안아준 덕분에 그는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의 앞에 소냐가 나타나고 또 그의 옆에 선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가 소냐의 아버지인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에게 보인 인간성이 그녀를 만나게 했고,또 그가 매춘부였던 소냐를 천한 여자가 아닌,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인간으로서 온전히 바라본 까닭에 소냐는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이다.소냐 역시 그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서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냐의 깊은 사랑 속에서 그가 자신의 죄를 자수한 이후에도 느꼈던 고통과 고독은,다른 이의 사랑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진정으로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보여준다.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벌을 치르는 것,즉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절망의 극복이 필요한 것이다.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눈속임 내지는 무조건적인 긍정은 답이 될 수 없고,그런 자신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여기서 그가 치른 벌,그리고 내가 감당해야 할 벌의 정체가 드러난다.모두의 앞에 내가 부끄러워하던 나를 그대로 보이자.그리고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이자.그 때 비로소 ‘벌’은 미래를 여는 희망의 열쇠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책장을 덮은 후 나는 지난 1년간의 나를 돌아보았다.나 자신에 갇혀 다른 누구도 보지 않던 나,그래서 나와 모두를 고통 속에 빠뜨리던 나.이제 해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도서관을 나와 생활관으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훈련소에서 받았던 어머니의 편지를 꺼냈다.여태 읽지 않고 넣어두었던 것이다.편지에는 시험에 떨어진 아들에 대한 원망도 없었고,미래에 대한 조바심도 없었다.다만 다치지 않길 기도한다는 것,그동안 공부를 너무 많이 했으니 당분간 생각은 멈추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말뿐이었다.편지를 다 읽자마자 나는 공중전화기로 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자대에 배치되던 날,의례적으로 소재지를 알리는 전화 이후 처음이었다.

얼마 전의 이야기다.

‘죄와 벌’을 읽은 지 몇 달이 지난 후,유격훈련이 끝나고 복귀행군을 할 때다.강원도의 여름은 친근하다.도시에서 자란 나도 내 키만큼 자란 옥수수나 넝쿨진 호박잎은 알아볼 수 있었다.그동안 나는 1번 더 사법시험을 치렀다.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않은 간부님들과 동료 전우들의 덕택이다.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나 긴장되지만,이제 절망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다.삶에는 합격도 불합격도 없기에.삶은 변증법이 아닌 생생히 살아 있는 그 무엇이기에. 행군 중 나타난 엄청난 경사의 산등성이에도 한 명의 낙오 없이 전진하는 동료들을 좇아 나 역시 근육을 팽팽히 조이며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광장으로 나가던 라스꼴리니꼬프처럼,그들에게 다가가 내 모습 그대로 닿기 위하여.그들에게 다가가 이제는 나 또한 그들의 안식처가 되기 위하여.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